AJDE NOLE !

9일간의 호주오픈 이런 저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9. 2. 2. 21:16

  테니스 선수였다면 디펜딩할 걱정에 처음부터 우승도 못할 팔자의 누군가-_-;;가 작년 봄부터 기대하고 또 두려워하던 호주오픈도 이렇게 마감됐군요. 모자란 감은 있지만(우승이 아닌 이상 언제나ㅋ) 대회 시작 전에 가졌던 초조함과 1라운드에서 느꼈던 끔찍한 경험을 떠올려보면 8강도 그렇게까지 나쁜 결과는 아니라 생각해요.


이미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찬찬히 뜯어볼 필요는 없겠고, 기권으로 끝난 그랜드슬램 디펜딩 미션 실패에 대해선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억울함만큼이나 여전히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안색은 붉어졌다 하얘졌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발은 천근만근 무거워져서 질질 끌고다니는 걸 보면서 역전에 대한 기대를 품는 건 무리였지만 막상 'stop'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엔 멍했어요. 화를 내야할지 이해를 해줘야할지도 모르겠고 그저 이렇게 끝나다니하는 하는 당황스러움에.. 

US오픈에서마저 기권하면 기권 그랜드슬램하겠다는 조롱섞인 표현을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좀 웃었어요. 누가 뭐래도 사실은 사실이고 본격적으로 프로 선수로 뛴 기간에 비해 벌써 네번의 슬램기권(05/06 롤랑가로, 07 윔블던 그리고 09 호주오픈)은 절대적으로 많은 숫자라서. 다른 경우까지 포함해 7번이라면 더 처절하게 매달려야할 슬램에서 오히려 더 많은 숫자를 기록했다는 것, 그것도 8강에서 두번, 4강에서 한 번이라는 상황 측면 역시 비난을 자초하는 부분이구요. (다른 세번은 06 우막 결승, 08 데이비스컵 1라운드, 08 몬테카를로 준결승 - 데이비스컵은 노박의 기권으로 러시아 8강진출이 확정되는 매치였고 다른 두 경우도 결승/준결승이니 기권하는 순간이 매번 결정적인 순간인 건 마찬가지군요. 이 녀석 -_-;;)

어쨌거나 똑같은 상황에서 오히려 나이도 더 많은ㅠ 로딕은 전혀 지친 기색없이 잘 버텼고 테니스선수로 살아오면서 가장 후회할 순간 중의 하나인 지난해 US오픈의 그 사건이 누구로부터, 왜 비롯됐는지를 떠올려보면 더더욱 하지 말았어야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죠. 지붕이나 스케쥴 문제는 접어둡시다. 노박팬으로서 불평할 수밖에 없지만 진정한 탑 클래스가 되기 위해선 이런 어려운 상황조차 이겨낼 수 있어야 마땅하고 이보다 더 어려운 상황도 말없이 받아들여야만하는 선수들이 널리고 널렸으니까요.


체력, 체력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절실한 필요만큼 체력 향상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들긴 합니다만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몸을 타고나는 건 아니란 생각은 들어요. 일찌기 호흡 문제로 프로 선수 생활은 하지 말라는 의사의 충고도 무시한채 여기까지 왔다는 것도 그렇고(전문가가 아니라서 잘은 모릅니다만 호흡문제라는 것이 근육경련이나 더딘 피로회복 등등 운동선수로서 절대적으로 불리한 여러가지 부작용도 함께 가져온다는 부분에서 더욱, 아빠가 냉정하게 밀어부쳤다는데 그 분이 하신 몇 안되는 좋은 결정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군요..;) 사람마다 같은 기후에 반응하는 정도는 제각각이기에 더위에 취약한 것도 단순한 체력 문제랄지, 적응의 문제로 치부할 수만은 없구요. 노박 말대로 노박의 몸 속에 들어가보기 전까진 누구도 정확한 상태에 대해 알 수 없겠죠. '이건 순전히 정신력의 문제다.', '죽을만큼 최선을 다 할 용기나 의지도 없는 선수다.', '기권하지 말았어야했다.' 등의 비난은 쉬워요.


조금의 호의도 없는 사람들이 신나서 해대는 비난때문에 반감이 들긴하지만 진정 탑선수가 되고싶다는 꿈을 이루고 싶다면 냉정하게 따져묻고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거 아닌가 싶을만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해결하고 말겠다는, 적어도 그런 의지로 최대의 노력을 기울여야만하는 문제인 건 틀림없어요. 설령 정말 남들보다 약한 몸을 타고났다고해도 그건 팬들에게나 먹힐 변명이지 다른 누구도 그것까지 감안해줄 이유도 없고 그런 변명이 결과를 바꿔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누군가는 오프시즌에 세르비아 산에 가서 훈련하는 게 전혀다 다른 기후를 가진 시즌 초반의 호주대회를 앞두고 과연 효과적인가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도하고(1) 코치를 바꾸든지 최소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줄 누군가가 더 필요한 것 아닌가하는 팬도 있고(2) 지난 겨울 머레이나 베르다스코가 했다는 식의 집중적인 체력훈련이 필요하다(3)는 의견도 있구요. 앞의 두 가지 의견은 판단하기 나름이지만 적어도 세번째만큼은 진지하게 고려해볼만하다 싶습니다. 누가 뭐래도 전문가인 그네들이 팬들보다 훨씬 더 잘 알겠죠. 최선의 방법을 찾길 바라며 지켜보는 수밖에..


(1) 시즌을 마치고나면 어릴 때 자랐던 곳으로 돌아가 훈련한다는 부분에서 겨울마다 계룡산 계곡의 얼음물에 몸을 담그며 의지를 다진다는 박찬호 선수가 생각나기도 ㅎㅎ;
(2) 바이다 코치님이 얼마나 죽이 척척 맞는지, 또 코칭 문제를 들기엔 먼저 생각해야할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도 잘 알지만 막상 또 그런 의견을 보다보면 변화가 필요한건가 솔깃해지긴해요..;; 기술적인 부분에서 제자리 걸음을 걷는 느낌도 약간 들고.. 정말로 코치님 많이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습자지 귀가 팔랑팔랑ㅠㅠ
(3) 머레이는 알려진대로 마이애미에서 고강도 체력훈련을 마쳤고, 베르다스코는 전 애거시 트레이너이자 현재는 아디다스 소속으로 여러분야의 운동선수 체력훈련 프로그램 관리를 해주고 있다는 분을 찾아 라스베가스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그리고 로딕도 새 코치님의 지시에 따라 엄격한 관리를 받으며 15파운드를 감량하는 노력을 했죠. 부상은 잦지만 체력이 딸린다는 생각은 안들던 얀코비치도 아주 건장한(?) 몸으로 나타났구요.

마지막 경기만 되새기고 있기엔 앞선 네 경기도 충분히 의미있죠. 특히 새벽 2시 반까지 진행된 4라운드 경기, 아직도 그 불타오르던 4세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4세트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자책에 가까운 3세트 타이브렉패였는데 첫 리턴 게임부터 오히려 이번 대회 최고의 집중력과 의지를 보여준 순간이었죠. 쉼없이 과감하고 공격적인 플레이로 몰아치며 한포인트 한포인트에서 노박의 열정이 그대로 전해지는, 심장이 뜨끈해지는 시간이었고 이런 모습이 바로 노박표 테니스의 진짜 매력이 아닐지 ^^ 덕분에 흥분을 잠재우지 못하고 여기저기 찾아 헤매느라 설날 새벽부터 식구들한테 핀잔듣고 잠도 부족했다는 문제는 얼마든지 기쁨으로 극복했습니다.ㅎㅎ



  한달의 호주 대회에서 썩 만족할만한 결과물을 얻어오지 못했고, 당분간 디펜딩해야할 포인트는 많이 남아있고, 예년보다 투어의 경쟁은 심화되어가고 데이비스컵이랄지 클레이시즌 중간에 낄 베오그라드 대회랄지 앞으로의 일정도 그리 호락호락하지않고.. 뭐 또 걱정하라면 얼마든지 더 할 수 있지만ㅋ;;; 어쩐지 가장 무거운 부담 하나를 내려버리고 온 듯도 하고 속상할 일은 미리 다 겪어버린 듯도 하여 남은 시즌에 대해선 여유가 조금 생겨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통해 하나씩 계속 배워간다는 이야길 자주 하는데 호주오픈 디펜딩이 중요했던만큼 큰 실수가 있었죠. 하도 여러번 들어서 몇백번째 받는 질문같다는 라켓 교체부터 시작해서 라켓 바꾸는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적응하는데 만전을 기하지 못했던 점, 시즌 첫 대회를 앞두고 호주에 늦게 도착해 첫 대회를 잘 치르지 못했고 그 결과 계획했던 것과 달리 그랜드슬램을 앞둔 주에 또 다른 대회를 뛰어야만했던 것 등은 확실히 드러난 실수고 스스로 깨닫는 다른 부분도 있을 거에요. 어떤 과정에서 나온 실수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기에 비난할 생각은 없으니 모쪼록 많은 비용을 치르며 배운 것들이 피와 살이 되어 차곡차곡 부족한 부분을 메워가길 바라요.


정신적&체력적으로 쌓인 피로는 일요일까지 쉬며 풀었다치고 이제 다음 대회인 마르세이유까지 2주가 남았습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이 기간, 오프시즌 동안 놓쳤던 부분 마저 정리하고 더 이상 공공연하게 놀림받지 않도록 라켓 문제도 잘 마무리 지어야겠죠. 무엇보다 디펜딩해야할 것보다 새롭게 도전할 수 있는 것들이 아직은 훨씬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 (심지어 '디펜딩'이라는 것조차도 아직은 도전과제ㅋ;) 그리고 모든 일은 오로지 자신의 라켓으로부터 비롯되고 라켓을 통해서 증명하는 것만이 진실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새기면서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자신감 넘치는 모습 되찾아 갈 수 있으면 하구요. 성숙해진다는 것과 코트에서의 승부욕이 덜해진다는 건 동의어가 아니랍니다. 어깨에 그려진 매 그림이 부끄럽지 않도록 라켓을 쥐고 있는 순간엔 날카로운 발톱을 바짝 세워주세요!!

*난데없는 존칭과 낯선 호칭은 뭥미? 싶을텐데 이유없이 오늘은 이러고 싶었.. ㅎㅎ;;;